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식사와 보급품 === >다들 어찌나 배가 고팠는지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단다... 아침 식사라고 해봐야 기껏 뿌리에서 짜낸 씁쓸한 차뿐이었어. 난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났어. 그래야 화장실을 갔다 와도 차를 배급받을 수 있었거든. 하루 한 번 [[순무]] 수프를 배식했어. 줄 맨 앞 가까이 서면 좋지 않았단다. 국물뿐이었거든. 줄 끝 근처가 좋았지. 바닥의 건더기가 떠올랐거든. 하지만 너무 뒷쪽도 좋지 않았단다. ...국물도 없을 때가 많았거든. 그리고 하루 한 번 모래처럼 까실까실한 빵조각을 줬지. 밀가루에 [[톱밥]]을 섞은 거야. 그 조그만 조각으로 종일을 버텨야 했어. 대부분 바로 해치워 버렸지만 난 늘 나중을 위해 반을 남겨뒀어. 그리고 저녁엔 상한 치즈나 잼을 먹었지. 재수 좋으면 일주일에 두세 번씩 내 손가락 두 개만한 소시지를 먹기도 하고. 우리가 먹은 건 이게 겨우 전부였어. 그들이 주는 만큼만 먹었다간 서서히 죽어가기에 딱 맞았어. >----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쥐]] 2부 2장 中[* 합본 기준 pp 213]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사람들 대부분은 혹독한 강제 노동 현장이나 부실한 식사로 영양실조로 인해 노동력으로 쓸 만하지 않을경우 바로 가스실에 끌려가 살해당했지만, 수용자들에게 제대로 된 영양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중요한 간접적인 사인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수용자들에게 하루 약 800~1,200 kcal를 공급했는데, 이는 평균적인 성인의 [[기초대사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으로서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사무 업무만 하는 사람에게도 모자란 수준이었다. 수용소에서 강제되는 노역의 강도를 생각하면 수용소의 배식량은 그냥 천천히 야위어 가다 굶어죽으라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주로 배식되는 품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 '''[[톱밥]]이 대량으로 섞인 빵''' 당시 나치 독일은 열악한 군수사정으로 자국 민관에 배급하는 빵에도 톱밥을 넣어 양을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수용소 유대인들에게 주는 빵은 이것보다 더욱 상태가 안 좋은 것으로, 케르테스 임레는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운명>에서 지푸라기가 씹히는 묘한 빵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 '''경비대원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로 끓인 묽은 야채 국''' 수용소 경비병이나 근무자들의 식사로는 군용 건조 야채를 사용한 국이 주어지곤 했는데, 이 건조 야채는 질도 안 좋고 식감은 더 안 좋아서 근무자들에게 '철조망'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심지어 여기서 '''쓰고 남았거나 상해서 빼둔 찌꺼기들'''로 수용자들에게 주는 국을 만들었는데, 이마저도 물을 마구 때려부어 끓인 탓에 최소한의 맛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운명>에 서술된 표현을 빌리자면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맛을 가졌다고 한다. > (전략)... 가죽장이가 먼저 맛을 보았다. 야릇한 표정이었다. 수저를 받아 입에 넣는 순간,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맛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구 토해 내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중략) "이게 바로 그 말린 야채 수프라는 거지."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전의 전쟁]]과 지금 [[제2차 세계 대전|진행중인 전쟁]]에 참전했었다고 한다. 그것도 장교로서 말이다. "거기서 이 음식을 질리도록 먹어 볼 기회가 있었지. 우린 독일군과 함께 전선에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루타바가|이런]] [[쓰레기|걸]] 먹더라고." (후략) (운명 - 임레 케르테스 중에서 발췌)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쥐]]에서는 무와 채소를 넣은 수프를 배급했다고 나오며[* '운명'에서 아우슈비츠 이후 대목을 보면 사료용 무와 알줄기 양배추로 만든 수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수용소의 식사는 대체로 이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마저도 매일 지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책에서 서술한 바에 따르면 묽은 국이 배급되었다는데, 앞줄에 서면 건더기 없이 국물만 있었다고 하며 그렇다고 너무 뒤에 줄을 서면 아예 남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이와 관련된 일화가 몇 개 언급된다. 그 중 한 이야기에 따르면, 묽은 국을 배급받을 때는 배급하는 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만 '''국자를 밑바닥까지 내려서 퍼온 국'''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저 상한 야채국의 건더기조차 제대로 못 먹는 자들도 많았다는 것. 이런 식사를 하다 보니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도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운명>에서 서술된 또다른 부분을 보자면,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사흘 째 되던 날에는 수프를 먹었고, 그 이튿날에는 심지어 기다리기까지 했다." (중략) "점심 식사는 수프였는데, 놀랄 정도로 이른 시간에 나왔다. 이어, 해거름까지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다가 점호 전에 빵과 마가린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자, 배고픔의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형편없는 식사조차도 주는 간격을 매우 띄워서 굶주림의 고통을 극대화했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화자는 곧 같이 수감된 사람들과 함께 부헨발트로 옮겨갔지만, 다른 수감자들은 계속 쭉 이런 생활을 겪었을 것이다. 부헨발트도 강제 수용소라는 건 변함없지만, 이쪽은 주 목적이 학살보다는 강제 노동이었던지라, 곤궁하지만 아우슈비츠보다는 나은 수준의 식사가 배급되었다고 적고 있다. * '''저급한 [[대용 커피]]''' 원래 대용 커피는 적당히 구운 곡물 등 멀쩡한 재료로 잘 만들면 나름 괜찮은 풍미를 가진 물건이다. 독일군이나 독일 치하의 민간인들은 이런 대용 커피에 설탕 등을 타서 그럭저럭 커피라고 마시고 살았다. 그러나 수용자들에게 제공된 것은 '''완전히 썩어서 스프로 내줄 수도 없는 야채 쓰레기들을 태워''' 잿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 내준 것이었다. 설탕 같은 귀중품이 지급될 리도 없었고 사실상 그냥 잿물이나 마찬가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겠다면서 이 커피를 전부 혹은 일부 마시지 않고 세수하거나 양치하는 데 쓴 수용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재를 푼 물은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비누 대용으로 쓰여 왔기 때문에 조악하나마 이걸로 씻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물론 제대로 된 세수와 비교하면 세수로 볼 수도 없지만,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어쨌든 나은 수준이었다. 놀랍게도 살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커피를 마신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한 데 비해 어떻게든 존엄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친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은 경우가 많았다. [[빅토르 프랑클]]이 그 중 하나였다. 지금 보면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싶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나마 씻고 관리하려고 노력을 보인 수용자들은 독일군이 잘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유대인은 하등 종족이라고 치밀하게 세뇌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의 독일군들도 인간인지라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하려 발버둥치는 모습에 본능적으로 그들을 해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이런 수용자들 중 상당수는 깨진 유리조각 등을 입수해 수시로 면도도 했다. 이 경험에서 빅토르 프랑클이 [[의미치료]]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 '''[[담배]]''' 조금 아우슈비츠에서는 노동자들에게 매주 3개비의 담배를 지급했다.[* [[교도소]]에서 담배가 금지된 것은 생각보다 역사가 짧다. 심지어 현대 독일에서도 주마다 다르지만 상당수의 교도소에서 흡연을 허용하고 있다. [[https://en.m.wikipedia.org/wiki/Smoking_in_Germany|출처]] ] 이 담배는 그나마 심신을 달래주는 유일한 것이었기에 [[대체화폐]]처럼 사용되었는데 수용자들은 이를 모아 빵으로 바꾸어 먹을 수 있었다. 블라덱 슈피겔만의 증언에 따르면 담배 3개비면 하루분의 빵과 같았고, 숟가락도 하루치 빵의 절반과 바꾸어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는 주변에서 징용되거나 취업해 일하러 온 폴란드인 출퇴근 노동자들이 있었고, 수감자들은 이들에게 담배 혹은 다른 귀중품[* 물론 거의 대부분은 수용소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아무리 잘 숨겨도 압수당했으나, 어떻게든 숨기는 데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을 주고 계란이나 치즈 같은 고급식품을 구매했다. 그래서 비흡연자나 살아남을 생각이 있는 수용자들은 담배를 절대 피우지 않고 모았고, 슈피겔만의 쥐에 언급된 사례로는 정말 성격이 독한 수용자가 이걸 200개비까지 모아서 [[보드카]] 1병을 사와 카포나 군인들에게 뇌물로 바치기도 했다고 한다. 식사도 굶어 죽을 수준으로 주는데 생존과 관계없는 담배를 주는 게 의아할 수 있지만, 각국 군대, 교도소, 수용소 등에서도 상당히 최근까지 배급한 물건이 담배다. 아주 낮은 비용으로 노동 의욕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군에도 2009년까지 군인에게 지급되는 면세 담배가 있었으며, 현재도 외국 파견 병력에 한해 면세담배가 지급된다. 직접적인 사용을 제외하고도 수용시설에서 최소한의 경제가 돌아가게 해서 통제에 도움이 된다. 현대에도 후진국의 열악한 교정시설들은 담배나 시중화폐 등의 사용을 용인해서 부유하고 힘있는 수감자들이 자체적으로 수용인들을 관리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이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관리 실패의 결과물이므로 선진국의 정상적인 교정시설들은 이런 행태를 철저히 막는다. 현재 한국 교도소에서도 담배는 형집행법에 명시된 금지물품이며, 인천구치소를 배경으로 한 [[교도소 일기]]에서는 주취폭행으로 체포되어 끌려갔더니 형사가 들어가면 담배 못피우니까 마지막으로 피우라고 건네주는 모습도 나온다.] 다시 말해, 담배가 필수품에 가깝던 시대에 한 주에 3개비는 확실히 사람 대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은 양이었다. 비교를 하자면, 우리나라 군대의 마지막 군 면세 담배인 'This' 기준으로 한 달에 15갑(일 환산 10개비)이 지급되었고, 2차 대전 당시 미국은 사병들에게 하루에 12개비를 지급하였으며, 혐연가로 유명하던 히틀러가 지배하던 나치조차 [[전투식량/독일군#s-1|하루에 7개비]]는 주었다. 즉 이를 감안하였을 때 일주일에 3개피라는 배급량은 감질난다 수준을 넘어서 그냥 안 주는 것만도 못한 행위였다. 이런 식사를 하며 몇 주만 지내도 건강에 치명적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달도 버티지 못 했다. 죽기 전에 수용소에서 해방되었어도 이미 건강에 치명타를 입어 고향에 도착하지 못하고 이동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례도 상당히 많았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